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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디션 체크: 회화의 불안은 곧 불멸

 

‘우리는 지금 회화를 보고 있다.’

이 문장은 다음으로 다시 쓸 수 있다.

‘우리는 회화의 미래를 과거를 현재를 보고 있다.’

 

회화는 언제나 완성된 상태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졌고, 도판으로 남겨졌고, 온라인에 업로드되었다. 그것이 남긴 이미지와 잔상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바로 그 작품’이라고 지칭하곤 한다. 전시 기간 중에 회화가 담고 있는 이미지 혹은 회화 그 자체가 보여주는 이미지는 전시가 끝난 후 사람들에게 잔상으로 남는다. 다양한 각도에서 디지털 사진을 찍어서 핸드폰 앨범에 보관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여기에서 남은 이 잔상은 당연하게도 이따금씩 실제 작품과 어긋난다.

그 관계가 필연적으로 어긋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자. 잔상 자체가 기억으로 보관될 때 필연적으로 왜곡되기에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이유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잔상을 남긴 회화 역시 위태롭다는 이유가 크다. 회화의 시간은 우리의 잔상과 디지털로 기록된 이미지와 또 다르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례를 들어 몇 백 년 전 계란노른자와 안료를 섞어 그렸던 템페라나 프레스코를 지금 실제로 본다면 그려졌을 당시의 모습과는 분명히 다르다. 물감의 색은 황변되고 주름지고, 회벽이나 캔버스와 같은 지지체에서 크랙이 생기면서 물감이 박락되기도 한다. 즉 물감이 떨어지는 박락의 단계가 되면서 이미지를 담고 있는 물리적인 채색층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를 잃어버리는, 좀 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이미지를 담는다는 회화의 목적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선상에 둘 수 있다. 이 박락 단계 이전에 채색층이 지지체과 점차 거리를 넓히면서 틈이 생기는 것이 바로 ‘크랙(Craquelure)’이다. 시간이 오래된 모든 회화에서 찾을 수 있는 이것은, 곧 회화의 노화이다.

시간의 흐름은 캔버스 표면 위에 쌓인 회화의 층위에 모두 적용된다. 크게 지지체, 절연체, 밑작업층, 물감층, 바니시층으로 나누어지는 회화의 단면에서 절연체, 밑작업층은 물감과 지지체가 잘 결합할 수 있도록하며, 바니시층은 최종적으로 그 회화가 잘 유지되게끔 코팅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곧 회화 작업이 영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도와준다. 정주원 작가는 2021년 개인전 《목젖까지 던지세요, 사랑에》부터 자체적으로 아교 템페라를 만들어서 일반적인 유화 물감층에 변주를 주었다. 유화나 아크릴 물감 대신에 동양화 재료인 백토와 아교 등으로 구성된 물감은 작품 표면에 5-6번 넘게 켜켜이 쌓였다. 사랑(특히 자발적 희생을 감수하게 하는 측면에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하는 전시는 물감에 대한 작가의 자발적 희생을 가늠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희생과 애정에 대한 이 전시 이후에 모든 작품이 마주한 것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의뭉스러울 ‘아교 템페라’에 대한 질문과 표면에 점차 커져 나가는 크랙이었다. 지지체와 물감층은 서로에게 결합하여 애정에 대한 이미지를 담았지만, 서로에게 멀어져가는 ‘회화의 시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작가는 결합력 있는 물감을 제작하는 데에 실패한 것일까? 혹은 회화의 노화라는 크랙은 사실상 모든 물감층에 존재하기 때문에, 애시당초 물감은 연약한 것이었을까? 캔버스 표면에 붓질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크랙은 태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크랙은 회화가 영속적으로 보존되는 데에 반대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여러 질문들 사이에서 작가는 “오랫동안 보존되는 안정적인 크랙”을 ‘만들기’로 한다.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따르면서 만들어지는 크랙과 이것은 분명히 다르다. 회화의 시간보다 크랙의 시간을 좀 더 빠르게 흐르게 하고, 그 순간이 영원히 가도록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전시에서 크랙은 회화의 종료를 알리는 증표가 아니다. 되려 다소 어긋나는 시차를 가지면서 크랙 자체에 주목하게 만든다. 물감을 겹겹이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작가는 아교 템페라의 비율을 달리하면서, 사포질을 하면서, 마감재 위에 광택을 없애는 시도를 반복하면서 크랙을 만들었다. 회화의 노화로 생겨난 크랙을 다른 시간대인 현재로 옮겨서 보이도록 하는 것은 말하자면 회화의 미래를 당겨쓰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회화는 전시되는 시점을 기점으로 영속적으로 보존될 기준점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크랙이다. 종료 시기를 암시하는 크랙은 회화의 미래이자 그것은 작품이 물감층이 시작하면서 태동한다는 점에서 회화의 과거이기도 한다. 즉 크랙 자체는 원래 영속적인 것이었고, 전시되는 그 순간 보여지는 회화에서도 그 영속성은 연결된다.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구분은 사실상 원래 크랙에서 무용한 것이었다.

이 크랙의 시간에 대해서 작가는 또 다른 시간들을 겹쳐 보인다. 조각과 한지의 시간은 회화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조각으로 된 회화의 이미지는 회화에서의 크랙과 다르게 점토를 통해서 질감이 만들어져 있다. 또한 한지 위에 회화 이미지 일부를 크게 그려서 마치 벽지처럼 부착한 것은 그 이미지의 또다른 시간을 보여주고자 한다. 점토와 한지의 시간은 또 회화와 다르게 지나가기에, 그것은 크랙의 시간과 비교하여 생각할 수 있게 한다. 크랙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다른 매체에서 또 다른 시간으로 흐를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미지에서 작가가 크랙을 발견했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켜 보자. 작가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연애의 모습이 아닌 이것도 사랑인지 되물을 수 있는 일상의 시간들도 포함된다. 크랙 역시 회화에서는 특별하게 마모의 순간이기 보다는 회화가 함께 품고 있었던 일상일 수도 있다. 그것을 사랑이라 마냥 지칭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사랑은 줄곧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불멸의 크랙》은 그 넓은 범주의 시간을 다 포괄하고 있다. 사랑의 이미지에서 시작하여 나온 크랙을 다시 영속적인 것으로 보존하고자 하면서 말이다.

이 ‘보존’을 영문으로 옮기게 되면 preservation과 conservation을 찾을 수 있다. 접두어만 다른 이 영문 단어들은 각각 이전 원래 상태를(pre-) 보존하여 유지하거나, 혹은 그것이 마모되는 것을 인정하고 마모가 진행되는 것을 전제로 삼아 그 진행을 마모와 함께 같이(con-)간다는 것으로 의미에 미세하게 차이가 있다. 회화가 전시되는 순간을 떠올린다면 전자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크랙의 불멸과 채색과 함께 시작되는 회화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떠올린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미술작품 보존을 번역할 때에는 conservation이 사용된다. 어떤 시기를 기준으로 작품의 수명을 늘릴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보존은 회화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영광스러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회화의 시간이 미끄러지면서 그 속도를, 소진을, 실패를 겪고 회화 안에 시차를 두고 등장하는 크랙이 지금 작품들의 표면에 있다. 물감층은 지지체와 결속에서 멀어지면서 크랙을 남기고, 그러면서도 애정 어린 관계로 남아있는다. 시간의 미끄러짐 앞에서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크랙 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회화에서 영속성은 무엇인지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미끄러짐을 함께 연습하자. 실패하자.

그렇게 크랙은 불멸할 것이고, 우리는 크랙과 함께 갈 것이다.

 

 

*유화 손상에 대한 정보는 안주원, 「유화의 손상유형에 대한 고찰」(2016), 건국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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